기억과 망각
박서영
20x14cm의 나열
OHP 필름, 아크릴, 포맥스
- 작품은 모든 방향에서 감상할 수 있으며, 감상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누군가’의 죽음들. 이 안타까운 죽음 속에는 사회 시스템의 이면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분노하고, 싸우고, 기억할 것을 다짐함에도 타인의 죽음은 기억의 벽 앞에서 부서진다. 이 작품에는 총 6가지 벽들이 있다. 이 글의 뒤 내용을 읽기 전에 벽에 있는 이미지가 무엇을 말하는 지 알아차리기는 힘들 수 있다. 처음에는 명확하고 생생하게 와닿던 죽음들이 결국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고, 변질되고, 상황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1) 아동학대와 학교폭력, 2) 노동자의 죽음, 3) 사회 시스템의 권력에 의한 죽음은 많은 선례가 있었음에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4)피해자를 방관하는 또는 몰아세우는 손가락, 5) 추모의 상업화와 일시성(SNS로 이어가는 미안해 챌린지와 이를 이용한 상업적 판매 등), 6) 결국 또다시 되풀이되는 현실을 보도하는 뉴스와 기사들은 사회시스템의 직접적인 가해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또다른 위해, 무관심, 망각을 나타낸다.
하지만 흐릿하게 보이는 레이어 사이로 6가지 주제들을 면밀히 관찰해준다는 행위만으로 이 벽들은 무너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작품의 앞과 뒤에서 보이는 이미지들이 가진 선은 그들이 서로 이어지는 순간, 가장 중앙에서 버티고 있는 사회시스템의 벽에 금이 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당신이 봐준다면, 알아준다면, 또 기억해준다면…
흐려지는 기억과 흐르는 시간을 넘지 못해 결국 끝에 다다를 수 없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망각이지만 이 순간에도 외로운 죽음을 맞이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머리에 새기는 것으로, 기억의 벽을 넘고 넘어 사회 시스템의 견고함이 끝내 무너질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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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같은 엔딩 (Ending like a movie)
김재윤
29.7cm x 42cm
종이, 디지털 인쇄
해피엔딩의 영화는 아름답다. 분명 아름다워야 하기에 주인공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원하던 바를 이뤄낸다. <해리포터> 속 해리는 더즐리 가족의 아동학대와 볼드모트의 지독한 괴롭힘을 이겨내고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한다. <덩케르크>의 토미는 수많은 전우들을 죽인 독일군의 폭격에도 살아남아 끝내 영국 땅으로 귀환한다. 직장 내 괴롭힘과 과로에서 벗어나 커리어우먼으로서 성공한 엔딩을 보여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드리아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정말 우리 사회는 해피엔딩 주인공들로만 이뤄져 있을까? 영화가 은폐하는 어두운 진실, 사회적 타살의 피해자를 상상해보자. 해피엔딩이 사라진 영화, 그 장면 주위에는 벼랑 끝으로 내몰린 죽음만이 자리할 뿐이다.
작품은 좌측부터 <해리포터> - <덩케르크>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순이다. 중앙에는 각 작품의 주인공이 가장 화려한 색깔들로 표현되어 있다. 이들은 과정이 어찌 됐든, 위기의 순간을 무사히 넘기고 생존해 해피엔딩을 맞이한 “주인공”이다. 그러나 주위에는 주인공의 화려함에 가려져, 같은 이유로 죽음에 내몰린 “일반인”들이 자리한다. 이들은 생명력과 활기를 잃은 채 단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일러스트 뒤의 패턴은 크게 두가지를 상징한다. 첫번째는 고통스러운 상황 앞의 무력함이다. 본래 나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손톱으로 살을 눌러 불안함을 표출하는 버릇이 있다. 어쩌면 아동학대를 받고 있는 아이들, 전쟁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는 군인들,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직장인들 역시 상황에서 느끼는 무력함 속에 손톱으로 제 살을 찍어내릴 지 모른다. 손톱자국은 이들이 죽음 앞에서 애써 외면하려는 고통을 의미한다. 두번째는 괄호이다. ( ) 이 괄호에는 사회적 타살을 당한 무명씨들의 이름이 들어갈 수 있다. 사회적 시스템의 부재, 관심의 결여 속에서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공란이다. 일러스트를 보며 영화가 씌운 프레임을 벗겨보고 현실에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사회적 죽음의 종류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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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꾼
이예원
42cm x 60cm
디지털 인쇄
사회적타살 앞에서 구경꾼이 되는 사람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게이브리얼의 죽음: 누구의 책임인가?>와 알랭드 보통의 글 <뉴스의 시대>에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과연 주체로서 기능하는가? 자신의 죽음을 주체적으로 직시할 때에도 용기와 노력, 시간이 필요한데, 타인의 죽음, 특히 지인이 아닌 미지의 X의 죽음을 주체적으로 바라봐주는 것은 쉽지 않다. 당장 SNS에서 수많은 일상글, 일상사진과 함께 흩뿌려진 '사회적 타살에 관한 이미지'를 볼 때의 모습만 떠올려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여행사진이나 유머글을 보고 잠깐 기분전환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회적 타살에 관한 뉴스나 사진을 보고도 잠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렇기에 이미지를 소비하는 우리의 태도에 준할 때 일상과 비일상 ㅡ 그 어떤 것의 중량이 더 무겁노라 감히 단정할 수 없다. 왜일까. 아마 그것은, 사회적 타살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의 연쇄가 불러일으킨 참극이지 않을까.
아동학대, 학교폭력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자살, 고독사, 코로나 블루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자살 등에 관한 헤드라인은 매년 종종 올라온다. '사회적 타살'이라는 제목만이 중압감을 전달할 뿐, 사실상 피해자와 피해 장소, 피해 시간만 다를 뿐인 똑같은 형태의 사회적 타살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익숙함을 느낀다. 똑같은 사건이 반복되는 데에 일시적인 슬픔과 분노를 느끼며, 몇 달 지나면 그 감정조차도 잊는다. 이러한 현실을 되돌아보며 스스로도 반성하기 위해 작품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가장 대중적으로 이용하는 인스타그램 피드 형식을 이용해, 죽음에 관한 사진들과 정보성글, 일상사진, 유머글, 풍경사진 등등을 무작위로 섞어서 배치했다. 죽음에 관한 사진이 도드라지도록 혹은 사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맥락 있게 사진을 배치하는 대신 최대한 날 것의 느낌이 나게 만들었다. 우리는 무심코 늘 그랬듯이 익숙하게 사진들을 훑거나, 전시된 사진들이니만큼 집중해서 한 장 한 장 보다가도 그 잔상을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서 지운다. 이게 뭐지, 그냥 흔한 사진들의 나열인가 ㅡ 하고 잊어주시면 된다. 이 작품은 잊힘으로써 완성된다.
결국, 죽음에 대한 주체적 태도를 논할 때 자신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 ㅡ 미지의 X의 죽음은 교묘하게 논외된다. 죽음은 전시되고, 우리는 구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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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 sensibility.
손예형
29.7x42cm
종이에 디지털 인쇄
Your sensibility는 올해 들어 기사화되었던 상징적인 사회적 타살만 5건에 대한 키워드, 개인적인 감상, 시사점을 나열한 작품이다. 무엇이 이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 사회적 시스템, 방관, 그리고 무책임한 언어와 언론들. 이 살인자들을 어떠한 해석의 여지도 주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텍스트 형태로 마주했을때, 우리 각자가 느낄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 어떤 대목에서 슬픔 혹은 분노를 느낄 것인가.
혹은 느끼지 않을 것인가.
관객들은 각자 다양한 상황의 사회적 타살에 대한 텍스트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제각각일 것이다. 누군가는 여성의 죽음에 분노하고, 누군가는 노동자의 죽음에 깊이 감정 이입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어린 학생의 죽음에 진정으로 가슴 아파 할 것이다. 또 어떤 상황에도 공감하지 못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 감수성'이 중요한 덕목이자 공감능력으로 대두되고 있는 지금, '타인'의 죽음을 보는 나의 감정이 사회적 감수성일지, 동정심일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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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d celebrities (죽은 유명인사들)
지혜민
100 x 72.7 cm
판넬, 생화, 점토 가변설치
돌고 돌다가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악수나 하이파이브 대신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인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이것이 내가 바라본 불가피한 풍경이고, 그와 그가 살아있는한 이 풍경은 지속될 것이라고 답하겠다. 풍경 속의 이는 말이 없다. 그 심정도 아주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만 한낱 죽음과 가까워진 장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어떻게 나눠야 할까?
- '물리적으로 행해지지는 않지만 상황과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조성되는 폭력에 집중'하여 이것이 사회적 타살에 기여하는 바를 회화 작품으로 드러내고 공유하고자 한다.
받침점마저 제대로 지지해주지 못하는 지렛대는 한쪽으로 쏠려버리고 별안간 균형을 잃고 무너지고 만다. 흘러내려가는 것들, 흘러서 쌓인 것들, 그 위로 또 쌓여 가는 것들. 이것을 인간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대입해 본다면 결코 자비로운 풍경일 수 없을 것이다. 자비없는 풍경 너머로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추모의 물결. 추모는 또 하나의 컨텐츠를 생성하고, 우리는 이 풍경의 끝에서 이러한 모순 가득한 상황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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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trum
박서현
40 x 60 cm
오브제, 아크릴 물감, 종이 인쇄
백색광은 프리즘을 통과할 시 여러 가지 색깔을 지닌다. 백색은 과연 백색일까. 그렇다면 그 수많은 색깔은 백색 안에 있다고 해야할까, 없다고 해야할까.
사회는 종종 남성성과 여성성을 하나의 색깔로, 이분법적으로 정의 내리곤 하지만 개개인은 하나의 색으론 표현될 수 없는 다채로운 존재들이다. 이 작품의 화자 또한 그러하다.
가운데에 놓은 스킨오브제 (‘skin for men’) 을 통해 알 수 있듯, 이 작품의 화자는 생물학적 남성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일컬어지는’ 여성성을 지닌 제품들을 사용하기도 한다.
‘난그걸[=태초의 세계]분홍과파랑으로칠하진않을래모든색이구분이안되도록검정으로…’
다른 색을 포용하는 사회를 만나지 못한 화자는 색을 구분 짓기를 거부한다.
그는 모든 색들이 자신이라고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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